매그놀리아 (magnolia, 1999)
3월 16일 목요일, 5도, 80/40%, 흐리고 한 두 차례 비.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네. 이런 날 새벽엔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설렁설렁 들어오는 비 냄새와 찬 바람을 맡는 것도 썩 나쁘진 않습니다. 비가 내리는 새벽에 혼자 깨어있다는 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람을 감정에 목마르게 하곤 합니다. 뭐, 가끔 그렇단 겁니다. (헛기침)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요즘의 전 봤던 영화를 다시 찾아보는 행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게 과거에 얽매이는 건지, 혹은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돌아보려는 건지, 혹은 시간이 남아돌아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요. (웃음)
"망각"의 혜택을 톡톡히 받기 시작한 후부터 전 과거를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과거는 절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네 참 좋은 말이로군요. 아하~ 그러고 보니 비 오는 새벽, 다량의 커피를 섭취한 후 3시간을 가장 알차게 보낼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네. 바로 ‘매그놀리아’를 보는 것이죠.
영화 매그놀리아는 아픔(‘트라우마’일 수도, ‘한’일 수도 있는)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바로 ‘우연과 필연’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세 가지 실화가 있습니다.
1. 런던 그린베리힐에서 사람을 죽인 혐의로 세 악당이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세 악당의 이름은 ‘그린’, ‘베리’, ‘힐’입니다. 우연일까요?
2. ‘리노가제트’지역에 일어난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소방비행기가 출동했고, 그 비행기가 담아 올린 물에는 심장마비로 죽은 스쿠버다이버 ‘델머 대리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리노 너게트 카지노의 딜러였으며 비행기 조종사였던 "핸슨‘은 사건 전날, 카지노에서 델머 대리언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사건 이후, 핸슨은 죄책감에 자살을 하죠. 우연일까요?
3. 17살의 시드니 베린져는 잦은 부모의 싸움에 절망하여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합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지기 전, 3층 자신의 집에서 부모의 부부싸움 도중 격발된 총이 시드니를 관통하여 땅에 떨어지기 전에 즉사하고 맙니다. 총을 쏜 부모는 항상 총알을 장전해두지 않았기에 총을 격발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총알은 시드니가 장전해 둔 것입니다.
그는 과연 자살일까요? 타살일까요?
셋 모두 일상에서 좀처럼 벌어지기 힘든 ‘우연’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영화 속 세계는 외견상, 실제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가상현실과 실제. 가상현실이 실제를 모방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거기엔 ‘개연성’이라는 암묵적인 법칙이 존재합니다. 즉, ‘있을 법한 이야기’를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가상현실은 실제에 종속됩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준 세 가지 우연투성이의 ‘실화’들은 앞으로 벌어질 가상의 일들이 아무리 억지구구식이라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전제사항이 됩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게 존재하겠습니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겠지요.
자... 이제 편히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으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웃음)
이 영화는 재밌게도 주인공이 8명(또는 그 이상)입니다. 영화 포스터에 ‘톰 크루즈 주연’이라고 적혀 있다면... 그건 명백히 영화홍보를 위한 ‘거짓말’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들도 유명스타를 내세워 돈은 벌어야 하니까요)
8명의 인물들은 제각각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두 틀립니다만,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으며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재밌게도, 직업, 성별, 나이가 다양한 8명의 현재의 상처들은 가볍게, 또는 무겁게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과거의 죄의식이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를 지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유산을 노리고 거짓결혼을 한 여인은 남자의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버거워합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죄를 지었고, 가출한 딸은 마약중독자가 됩니다.
경찰이며 이혼경력이 있던 남자는 가출한 딸을 우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어린 천재 소년은 아버지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퀴즈프로그램에 나갔고, 퀴즈 중간에 소변을 보며 퀴즈를 망쳐놓습니다.
어려서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한 남자는 나이가 들어 무능력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퇴출당합니다.
이들 모두의 이야기는 서로 복잡하게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영화가 흐를수록 그들은 현실의 버거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해성사를 하듯이 죄사함을 원합니다.
괴로워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한 노래를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Aimee Mann - Wise Up
https://youtu.be/aNmKghTvj0E
당신이 처음 시작했을 때
생각했던 거와 똑같나요?
당신이 원하던 걸 얻었지만
견디기 너무 힘들죠?
그건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현명해 질 때까지
치료법이 있는 게
확실한가요?
당신이 드디어 찾았다고 믿죠?
술을 마시면 슬픔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죠
마음이 가라앉고
슬픔도 사라질 거라고요
하지만 멈추지 않을 거예요
멈추지 않을 거예요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현명해 질 때까지는
그러니 포기해요.
그들이 쥐고 있던 과거에의 집착을 포기한 순간... 믿을 수 없게도 하늘에선 개구리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개구리들이 쏟아지는 동안 그들은 서로의 상처가 ‘정화’되었을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지는 게 너무 생뚱맞다고 생각하신다면, 영화 초반에 일어났던 생뚱맞은 ‘실화’들을 떠올려보세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웃음)
자 이제 영화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현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비는 그쳤고, 현실은 이렇게 제 주위에 있습니다. 과거는... 여전히 절 괴롭히고 있군요. 어디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할까요? 어디서부터 마음의 평온을 찾아야 할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구리비는 내릴 기미가 안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풀어놓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구원을 주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부르는 에이미 만의 융단폭격을 받고 나면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이 조금은 달리 보이는 것 같습니다.
현실을 모방한 가상현실이지만, 또 현실에 영향을 주는군요. 서로 피드백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습니다. (웃음)
저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랜만에 매그놀리아 OST를 꺼내 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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